인물 대한민국에서 후원자로 산다는 것 - 김영일 후원자

2016.11.022,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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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후원자로 살아가는

가장 보통의 그러나 가장 특별한 그들의 이야기




사는 동안 더 많이 베풀어야죠.
그래야 웃으면서 어머니 얼굴 뵐 수 있을 것 같아요.


후원 20년을 알리는 소박한 액자와 팔순을 축하드린다는 카드 한 장에 감사의 마음 꼭꼭 눌러 담아 보내주신 이메일.

감사하고 궁금한 마음에 드린 전화, 수화기 너머 들려오던 떨리는 목소리에 덜컥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꼭 한번 찾아뵙겠단 약속을 지키던 날. 다급한 ‘같이 가요’ 소리에 다시 열린 엘리베이터에 동행하신 분은 공교롭게도 후원자님 댁에 배달 가시던 요구르트 아주머니. 배달 갈 때마다 주머니에 뭐라도 챙겨주시며 마음 써주시는 참 좋은 분들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설렘으로 시작해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끝난 김영일 후원자님과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눌게요!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 인사가 마지막이 될 줄 꿈에도 몰랐어요.


원래 고향은 북쪽의 진남포예요. 어릴 때는 꽤나 잘 살았는데 세월이 바뀌면서 많이 힘들었지요. 평양으로 이사한 후에는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자동차 공장에서 소사로 일했어요. 어린 마음에 어찌나 공부가 하고 싶던지, 꼭 1년 만에 기어이 학교에 들어갔지요. 한 맺힌 듯 열심히 공부했다오. 난 꼭 장학금을 받아야 했거든. 나와의 약속이었던 게지요.



1950년, 6월 어느 일요일에 갑자기 학교에서 비상소집을 하더라고요. 운동장에 갔더니 트럭들이 줄지어 서 있어요. 그 트럭에 실려 내려온 곳이 경북 경산이에요. 학생이던 내가 하루아침에 군인이 된 거지요. 참전 중에 인천상륙작전이 있었고, 내가 속한 군은 해체됐어요. 그 길로 남한에 남게 되었지요.


내 지금 이렇게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헤어지던 열여덟 살의 내가 된다오. 헤어진 지 꼭 65년 되었는데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던 내게 웃으시던 어머니 모습은 생생합니다. 그 인사가 마지막이 될 줄 꿈에도 몰랐어요. 어머니가 참 많이 그리워요.



참 고생 많이 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순간마다 도움을 받았더라고요.
 
처음 정착한 곳이 부산이에요. 말 그대로 혈혈단신이었지. 부두에서 잡일을 하면서 먹고살았는데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 하나로  53년에 무작정 상경을 했어요.


할 일, 잘 곳이 있을 리 없지요. 빵 장사도 해보고, 기와 이는 일도 하고, 지게로 짐 날라 주는 일도 했지요. 잠은 서울역에서 잤어요. 추위는 피할 수 있었으니 그것만도 감사했죠.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서울역에서 만난 ‘조석오’라는 친구가 자기가 하던 일이 있는데 네가 한 번 해보지 않으련? 제안을 하더라고요. 조, 석간으로 신문을 배달하는 일이었어요. 신문 배달 월급 덕에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모두 친구 석오 덕분이지요. 그렇게 늦게나마 학교를 들어갔지만 제 거처는 여전히 서울역이었어요. 얼마나 초라하고 남루했겠어요. 하루는 같은 반 ‘신현익’이라는 친구가 어디서 지내냐고 묻지 않겠어요. 부끄러울 것도 없었지요. 있는 그대로 말했더니, 자기 자취방에서 같이 살자대요. 그때 현익이와 같이 덮고 자던 이불 모양도 아직 기억납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현익이와 현익이 가족에게도 도움을 참 많이 받았어요. 돌이켜보니 고생도 많았지만, 그 순간마다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네요. 혼자였다면 이 날 이때까지 못 살았지 싶어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데 내가 작은 도움이 됐다는 생각만으로도 더없이 기쁘죠.


도와준 이들 덕분에 고등학교, 대학교 공부도 무사히 마치고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이 됐지요. 군포중학교 교장으로 있던 95년, 당시에는 한국복지재단이었던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통해서 두 남매를 돕게 되었어요. 여기 이 사진 속 아이들이에요. 지금은 훌륭한 사회인이 됐겠지요. 


겸손하지 못하고 자랑하는 것만 같아 부끄럽지만, 이후에도 힘이 닿는 데까지 아이들 돕는 일을 계속했어요. 힘들었던 시절에 내가 받았던 도움을 갚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돕는 일이 제게 큰 기쁨이 되더라고요. 돕는 동안 아이들에게서 오는 사진이나 소식도 너무 소중했지만, 아이들이 장성해서 연락이 끊겨도 나름의 기쁨이 있어요.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서 잘 살고 있겠구나, 상상만 해도 미소가 지어져요. 퇴직하고 지내면서 그런 즐거움이 참 큰 도움이 돼요.



사실 지금 너무 적게 돕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던 참이에요. 내가 좀 더 도울 수 있도록 알려줘요. 넉넉지는 않아도 자녀들 다 키웠고, 꼬마였던 손자들도 청년이 다 되었으니 우리 부부는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보내주신 것 받고, ‘아, 벌써 20년 세월이 흘렀구나.’ 싶었지요.


부끄럽지만, 내 도움이 필요하겠다 싶으면 어디든 돕고 있어요. 그저 그것이 내 기쁨이니까요. 그런데 작년 말에 뜻밖에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큰 선물을 받았지 뭐예요? “20년의 사랑, 20년의 감사”로 시작하는 편지가 들어있는 작은 액자였어요. 찬찬히 읽어내려 가다 보니 눈시울이 붉어집디다. 95년 당시 알게 된 남매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덕분에 내가 20년이나 이 좋은 일을 계속했구나 싶어서요.




또 같은 해 팔순을 축하한다는 카드도 받았어요. 실제 나이는 조금 더 되지만 호적상으로는 그 해 팔순이었거든요. 이 나이 되고 보니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도 감사한데, 여전히 나눌 수 있는 것이 더욱 감사해요. 그런데 그런 카드까지 받고 보니 내 너무 고마워 메일을 보냈지요. 늙은이가 이메일 보내 놀랐지요? 그래도 그 덕에 이렇게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눌 수 있으니 참 잘한 일이다 싶어요.



남은 날 동안의 숙제에요.

웃으면서 떳떳하게 어머니 뵈려면 더 많이 베풀어야죠.


글쎄요. 대한민국에서 후원자로 산다는 것이라. 더 많이 나누고 도우라는, 제 남은 날 동안의 숙제가 아닌가 싶어요. 그리운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날, 웃으면서 떳떳하게 뵈려면 더 많이 베풀고 살아야지 싶어요.


우리 아이들, 손자들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 시절에 했던 고생과는 또 다른 문제들로 후손들이 참 많이 고생하는 것 같아요. 조금 더 산 사람으로서, 주제넘지만 한마디 한다면 가까이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나눌 수 있는 것은 나누면서 다른 의미를 찾기보다는 인생 자체를 사랑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늙은이 잔소리 들어줘 고마워요. 그저 모든 것이 참 고마워요.



:: 취재후기 ::

애정 가득 담아 해주시는 말씀 들으면서 어느 시인의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 꿈을 꾸라' 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살았다고 하시지만 우리는 차마 상상도 못할 갖은 고생 속에서 생에 대한 얼마나 강력한 의지로 지난 세월 살아내셨을지 짐작은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해 보내주시는 도움에 그 의지와 마음까지 더하여 잘 전달하겠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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